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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전라도

'목포의 눈물'이 흘러나오는 유달산을 찾았다.

by 산수유. 2009. 8. 19.

 

 

이번 팸투어는 진도 였지만 일단 일행과 목포에서 합류해야 했기에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싣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목포로 직행하는 버스시간을 맞추기가 힘들다보니 일단 광주로 가야했다.

 

여행가방을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단단히 여민 후 현관을 나서는데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진다

윈도우브러쉬가 정신없이 왔다갔다를 반복해도 빗물을 걷어내는게 힘든가 보다.

 

그렇게 바쁜일상 뒤로하고 목포에 도착하니 일단 비는 주춤한건지 잔뜩흐린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하루밤을 묵을 숙소에 짐을 풀고 유달산을 올랐다.

 

 

 본디 3개의 섬으로 되어있었으나, 지금은 육지와 연결된 삼학도가 보인다.

  3마리의 학이 내려앉아 섬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있다.

 

 도심속에 우뚝 솟은 유달산에서 바라 본 목포 시 풍경이다.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그대로 들어온다.

 

전라남도 서남단에 위치한 목포는 북쪽은 무안, 서쪽은 신안과 접해있으며,

동남쪽으로는 양산호를 사이에 두고 영암,  해남, 진도와 마주한다.

주변지역 지명만 들어도 아름다운 곳임을 알 수 있다.

 

  

노적봉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오르다보니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었다.

우리나라 노래비 중 가장 최초에 세워졌단다.

1930년대 궁핍한 삶과 사람들의 응어리진 서러움을 노래로 달랬다 더니.., 바위에 새겨진 노랫말이 서럽게 느껴진다.

 

 

  

 

유달산에는 달선각, 유선각, 대학루등 5개의 정자가 있다. 산위로 유선각이  보인다.

조선헌종10년에 전쟁무기로 제작되어 사용된 오포 (▼) 는 일제시대부터 정오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되고 있다. 

대학루 앞에 있으며 현재 지방문화재 제 138호로 지정되었다.

 

 

 

 

 

흰구름이 쉬어간다는 유선각

 

유선각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있는데 어느새 날이 저물어 간다.

이곳 유달산에는 영혼의 심판을 받는다하여 이름 붙여진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이등바위(이동바위)로 나뉘어져 있다

이들 기암괴석과 정자에는 조명을 설치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며 꼭 구경하라는 택시기사분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대학루에 조명이 켜졌다.  대학루 위로는 떼지어 유달산을 넘어가는  구름사이로

달빛이 제 몫을 하려는 듯 두둥실 떠 있다.

  

 

노적봉에서 유달산야경을 바라보고자 이동을 하는데 길목에 희안하게 생긴나무가 걸음을 멈추게 한다.

참으로 민망하게 서 있는 이나무는 팽나무로서 모양이 여성의 인체 일부를 닯았다하여 다산목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노적봉 야경.,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적은 군사로 왜군과 맞서기위해

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마치 군량미를 쌓아놓은  노적처럼 보이게 해서

왜군들이 많은 군량미를 쌓아둔것으로 착각하여 도망을 치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유달산을 등지고 목포시가지를  바라보고 섯는 이순신 동상을 뒤로하고 내려오는데

'루미나리에' 거리가 환상적인 야경을 보여준다.

 

  

 

 멋과 맛 빛의 도시 목포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두번째 찾은 목포.., 유달산을 올랐을 때 고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노래비를 보고 아버지를 생각 했었다.

아버지의 자식사랑이 유난했던 기억 때문인지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아버지이야기를 종종 하게된다.

난 목포의 눈물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던 노래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아버지께서 기분 좋게 취하실 때면 흥얼거리시듯 부르시던 노래인지라...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시던 아버지께서는 고향을 떠나온 설움을 노래로 푸셨던건지...

'처녀뱃사공' 노래와 더불어 즐겨부르시던 '목포의 눈물'..., 그 노래 가사를 읽어내려가며 왠지모를 그리움이 밀려온다.

 

이제 항구도시 목포는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목포의 눈물을 뒤로하고 멋과 맛 그리고 빛의 화려함으로 거듭나고 있다.

 

 

목포는 일찍이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勿阿兮)군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안군으로, 고려시대에는 물량군(勿良郡), 또는 무안군으로 불리웠다.

이러한 이름들은 지금의 목포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안군, 신안군과 함께 더불어서 불렀으며,

오랜 세월동안 이 고장의 행정구역은 여러번 바뀌었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나주목의 속현으로 이어왔다.

「목포」라는 이름은〈고려사〉라는 역사책에서 처음 나오는데, 땅이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목포(木浦)라고 불렀다고 하고, 목화가 많이 난다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서해로부터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조선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만호진」이 설치 되었으며,

임진란 때에는 목포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친히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동안 머물렀으며,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 되었다. 그후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던 해의 10월 1일「목포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32년에는 무안군 일부지역을 더하여 8.6㎢의 도시면적에 인구 6만인 전국 6대 도시의 하나로 성장하여

一黑(김), 三白(면화, 쌀, 소금)의 집산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9년 8월 15일「목포부」를 비로소「목포시」로 고쳐 부르게 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포 신항·

무안 국제공항 건설 등 SOC 투자촉진과 대불·삼호공단 조성으로 산업기반 시설이 확충되어

 서남해안 시대의 중추기능을 담당한 세계로 웅비하는 미래의 도시이다. [출처 : 목포시]

 

늦은 진도 팸투어 후기를 시작하려니 새삼스럽다는 생각마저든다.

빠쁜 일정 뒤로하고 진도 팸투어를 다녀온 다음 날 문자메세지가 떳다. '메일확인...평가인증국...'

봄 부터 준비해 온 어린이집 평가인증 날짜가 9월 1~4일로 정해졌다는 알림메세지였다.

9월 초가 되지 않을까하는 짐작은 했었지만, 초 하루부터 대기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보니

그동안 조금은 느슨히 생각했던 선생님들 몸놀림이 바빠졌고

나역시 해야 할 일들을 빨리 마무리 지어야겠다는생각으로 지냈다.

아직도 눈에 보이는건 처리되지않은 여러 일들이지만 그래도 잠시의 시간을 내어 늦은 후기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