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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울산광역시

벚꽃이 활짝피었을 울산 서생포왜성

by 산수유. 2010. 4. 10.

 

 

 서생포 왜성(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초 가토오 기요마사의 지휘하에 돌로 쌓은 16세기 말의 전형적인 일본식 성으로 부산왜성에 이어 3번째로 쌓은 석성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어 물자와 인력수송에 용이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해발 200m 산꼭대기에 본성을 두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중간 둘레에

제2성과 가장 아래에 제3성을 두었다. 성벽의 높이는 6m로 기울기는 15도, 성전체 모습은 직사각형으로 일본성의 모습이 이런 사선형태로 날카로운

모양을 하는데 이는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위엄을 나타낸다는 직각.., 일본성의 특징 또한 직각의 형태를 보인단다.

 

'석성'아래 밭은 '해자'였을 것이라고..

 

 

성벽 밖에는 2, 3중으로 '해자'를 둘렀다고 한다. 지금 밭이 있는 자리라는 해설사님 설명이다. 

성곽의 전체면적이 호를 포함하여 46,000평에 이르고 호를 제외한 성 외곽부의 길이가 약 2.5㎞, 평면상의 직선거리는 동사 약 870m,

남북 약 370m에 달해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가장 웅장하단다. 또한 성의 내외부에는 다수의 우물터가 확인된다고 한다.

 

 

 

 오르는 길옆으로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내성 주 출입구

 

 

 

 

내성 부출입구

 

 

성에오르니 명선도가 보이고

 

 

새로 개통된 명선교도 보인다.

 

 

 본성에는 장군 처소인 천수각과 우물인 장군수 자리가 있다. 성벽이 다른 성벽과는 다르게 15도정도 기울어있는 성안은 네모라지만

적이 쳐들어오기 어렵게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는 성벽들이다. 선조27년(1594)  이 왜성에 사명대사와 가등청정사이에 휴전회담이 4번이나

오고갔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평화교섭은 실패했단다. 그 당시 사명대사는 웅촌에 있는 운흥사에 머물면서 이곳에 와서 회담을 했고

결과는 비록 실패했지만 조선인의 당당함을 보여주었다는 평을 받는단다.  

결국 1598년(선조 31년) 명나라 마귀(麻貴) 장군의 도움으로 성을 되찾았고, 1년 후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53명의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창표당(蒼表堂)을 세웠으나 지금은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다.

 

  

동글동글한 자갈돌이 박혀있다. 전투에 쓰인 돌들로 추정한단다.

 

 

이 왜성은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조선에서도 약 300년 동안 조선 수군(水軍)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사용했던 성으로,

남문 일부의 훼손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16세기말의 일본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고목이 된 벚나무가지에서 꽃봉오리들을 한껏 물고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울지 짐작이 가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이곳을 다녀 온지가 4월 첫주였으니 아마도 이번주면 어느정도는 활짝피지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서생포왜성(시문화재자료 제8호)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