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을 이어 온 백제의 정기[1]
1400년을 이어온 백제의 정기 , 미륵사지.미륵사지석탑
미륵사는 백제무왕(600~641)대에 창건된 사찰로 증원과 동.서원으로 이루어진 3원 병렬식의 가람이다.
미륵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삼국유사]기이, 제이, 무왕조에 언급된 기록을 보면
"무왕과 그의 부인이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지금의 미륵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므로 경의를 표한뒤 부인이 '못'가에 절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니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고,
미륵법상 삼존과 전, 탑, 낭무를 각각 3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한다.
동양최대의 사찰이였던 미륵사지는 비록 그 터만이 남아 있고, 1400여년 가까이 미륵사터를 지키던
미륵사지석탑도 시멘트덩어리로 지탱하다 다시 태어나기위해 사라져서 볼 수 없었지만
다시태어나는 날을 기다리며 광활한 미륵사터를 바라보니 1400년을 이어온 백제의 정기가 느껴지는
고대속으로 들어온 듯... 무왕의 마지막 승부였다는 익산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돌아본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은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석탑이며 미륵사지서원에 유일하게 서있는 건축물로
1층 동서남북 방향의 십자형 내부 공간과 중심에 심주석을 형성하고 있는것이 매우 큰 특징이다.
입면에서는 목탑과 같은 구조와 건축기법을 표현하고 있어서 당시 백제건축문화의 수준을 엿볼 수있다.
이 석탑은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절반이상붕괴되어 6층까지 일부가 남아있던 것으로
1999년 해체 보수정비가 결정되어 현재 진행중에 있다. 석탑 해체조사 중 2009년 1월 14일 1층 내부 적심부재와
심주석을 해체조사하는 과정에서 심주석상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금제사리호, 금제사리봉안기, 은제관식등
유물 683개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석조건축 기술면에서도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미륵사지석탑은
목탑양식을 석재로 바꾸어 표현한 것으로 이는 목탑에서 석탑으로변화하는 과도기적인 구조를 보여주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한다.
유물 출토상황▲
금제사리봉안기 ▲
백제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으로
미륵사의 창건배경, 발원자, 석탑 건립연대등을 알 수있다. 금판에 193자가 적혀 있는 금제사리봉안기는
음각으로 새긴다음 붉은색으로 칠을 해서 글씨가 선명하다. 해서 문헌사와 백제시대 서체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는데
붉은 색으로 칠을 한 이유가 후대에 잘 읽을 수 있도록한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해설사님 설명하신다.
사리봉안기 내용을 살며보면 그 내용이 상단, 중단, 하단으로 나누어 기록했는데 모두 찬양한 대상이 다르다.
상단은 부처에 대한이야기가 적혀있고, 중단은 석탑건립자에 대한 내용이며, 하단은 왕과 왕비를
찬양하는 내용이란다. 이중 중단내용이 그 의미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옮기자면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근을 심으셨기에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태어나셨다. 왕후께서는 만백성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으니
재물을 기부하여 사찰을 세우시고 기해년(639) 1월 29일에 사리를 맞이하셨다."고 기록 되었단다.
이 내용에서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는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서기 639년)와 더불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설화가 역사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고 한다. 설화에서는 무왕이 신라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선화공주의 소원으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귀족의 딸로 기록이 되어있단다. 또한 미륵사를 세우게 한것도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귀족의 딸로 기록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서동 설화에 나오는 선화공주는 가상의 인물일 가능성있고 설령 실존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선화공주는
미륵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다는 이야기라는.... 그렇게되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미륵사 창건설에서도
이야기가 달라진단다. 삼국유사는 기록하기를 "신라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어 미륵사의 창건을 돕게 하였다"고 했는데
그 당시에 두나라는 전쟁 중이였으며, 이치적으로 보더라도 사위가 장인과 죽기살기로(해설사님 표현 ^^;;)
전쟁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는... 해서 미륵사는 순전히 백제의 독자적기술로 만들어진 사찰이라는 것....
멀리 미륵산과 해체 . 복원중인 미륵사지석탑(좌)과 동탑(우)이 보인다.
미륵사지석탑 해체 중인 모습▼
십자형 내부 공간과 중심에 심주석을 형성하고 있는것이 매우 큰 특징이다.
금제사리호
미륵사지석탑 해체 중 발견된 유물들
미륵사를 상징하던 2기의 당간지주가 마주보고있다.
미륵사지석탑방향에서 바라본 동탑
미륵사지 석탑 뒤편의 금당자리 ▲
미륵사의 절배치는 동탑과 서탑은 석탑이며, 중간은 목탑이 있었다한다.
목탑형식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도기적 표현을 생각하면 중간탑이 가장먼저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했는데 이것이 회랑(복도)으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에 옆면이 4칸, 바닥은 빈 공간이 있다.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단다.
같은이야기지만 해설사님 설명으론
금당이 지어졌던 자리를 보면 바닥에 돌들이 박혀있는 이유를원래 못이였던 자리에 사찰을 세웠다고 봤을때
단순히 흙으로만 채우는 것으로 부족해서먼저 돌들을 박아 기초를 탄탄히하고 또 돌기둥으로 바닥의 공간을 두었단다.
그당시 용신을 섬기던때라 신앙에의해 용이 지나갈 자리를 만들었다고는 하나 이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고
돌기둥을 세움으로 습기를 막을 수 있게 한 것이라는 해설사님 설명이다.
이 금당터는 고려·조선시대 건물터에서 온돌시설이 발견되어 온돌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단다.
출토된 유물로는 기와나 토기, 금속, 목재 등 다양하며 글자를 새긴 기와도 많이 발견되었다.
서쪽에 있는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 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목조건축의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단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곳이라고 한다.
금당자리에 돌기둥이 세워져있다.
미륵사지 석등하대석(문화재자료 제143호)
미륵사터에 남아있는 것으로 석등 받침돌의 일부란다. 모두2기가 남아있으며
1기는 동쪽에 새로 복원해 놓은 석탑과 법당터 사이에 있고, 다른1기는 중앙의 목탑터와 법당터 사이에 있다.
연꽃의 부드러운 곡선그리고 연꽃무늬의 모습이 이 절터에서 발견된 연화문 수막새와 비슷하고
지금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인 것으로 보아 미륵사 창건시기와 비슷한 무왕때 작품으로 추측된단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등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석등의 처음양식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백제인과 현대인의 합작품, 미륵사지 동탑
동쪽에 있는 탑으로 정식명칭은 동원9층석탑이다. 1992년에 새로 복원되어 새것의 느낌이 많이 나지만
석탑 기단석과 탑신석등은 남아있는 석탑의 부재들을 사용해서 색이 다른 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석조의 찰주를 대고 7바퀴를 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해설사님 일행들에게 소원을 빌으란다.
소원이 이루어 진다면야 7바퀴가 아니라 70바퀴인들 못돌까. 찰주를 7바퀴를 돌며 역시
수능을 앞둔 딸애를 위해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알고있는거 만큼은 모두 생각나게 해달라고....
평소같으면 이런 이야기는 흔히 웃자고 하는 소리라 생각하고 예사로 넘길말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싶은건 나도 어쩔 수 없는 고3을 둔 대한민국 아줌마인가 보다. ^^;
찰주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고있는 일행들.. ^^ 어떤 소원인지 꼭 이루어 지기를..
보물(보물 제236호)로지정되어 있는 당간지주이며
1997년에 개관된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세운지주로서 미륵사지남쪽에 2기의 당간지주가 약 90m의 거리를 두고 서있다.
대개 당간 지주는 중문 밖 입구에 세워지는 것이 상례인데 미륵사지의 것은 중원의 중심축 선을 기준으로 좌우 양쪽으로 배치하고 있다.
동편 당간지주로 주위에는 미륵사지 석탑의 부재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탑의 노반덮개석
미륵사와 석탑등의 내용들은 익산시에서 제공한 책자와 익산시 문화관광홈페이지, 익산문화원 그리고
문화해설사님께서 설명해 주신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했으며, 이어 포스팅 될 왕궁리유물 전시관과 연결이된다.
마한 백제의 숨결이 아로새긴 천년고도 익산, 멀게만 느껴져 늘 망설여졌던 여행지였다.
익산은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고, 성스런 순교자들의 아픔을 간직한 마을도 있다.
1400년을 이어온 백제의 정기가 느껴지는 익산에서 곳곳에 남아있는 서동의 자취를 찾아봐도 좋고,
함라돌담길을 걸으며 따뜻한 추억속으로 잠겨봄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는 왕궁리 유적을 통해 사라진 백제의 왕궁을 찾아가는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미륵사지 석탑이 다시태어나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 익산시청 문화관광과 ☎063-859-5778
▲발굴현장을 토대로 그려진 미륵사 전경
1400년을 이어 온 백제의 정기는 [1]~[3]까지 내용이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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