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이야기.../경상북도

[경북-안동] 퇴계선생의 자취를 찾아 도산서원을 가다.

by 산수유. 2010. 1. 2.

유교문화의 본향 도산서원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사적제170) ☎054-656-1073

 

도산서원은 해동주자라 일컫어지는 한국 최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들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으로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과 유림에서 선생의 높은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선조 8년(1575)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한석봉의 친필로 된 편액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한옥이 주는 느낌은 늘 그렇듯,,, 정겨운 모습의 도산서원.

 

우리나라는 성리학이 국가 이념인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부터 본격적으로 예질서가 편찬되고

정비된 것으로 알고있다. 성리학은 그 만큼 우리나라에 예의 기본을 정립?한  학문이라 말할 수 있는..

그래서 안동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타이틀을 자신있게 사용하는가 보다.

 

 주차장에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

 

 

 

 

 추로지향비

"중국의 맹자, 공자가 살았던 곳과 같이 안동은 예절과 학문이 빼어난 곳이다"는 말이라는데

한자 풀이로는 한마디로 예절을 학문앞에 내세우고 있다고 해야하나...

 

 천연대로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아름답다고 한다.

 

 

 시사단(유형문화재 제 33호) 안동시 도산면 의촌리 556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과거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로 정조는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조판서 이만수에게 도산별과를 새로 만들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거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영의정 채제공의 글로 비문을 새기고 시사단을 세웠다. 그 뒤 순조 24년(1824)에 고쳐 세우고,

1974년 안동댐 건설로 현 위치에서 지상 10m의 축대를 쌓아, 그 위로 비각과 비를 옮겨지었다고 한다.

강건너 비각은 조선시대  지방별과를 보였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며, 정조가 퇴계 이황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그 16년(1792)에

 관원 이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임금의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이곳 송림에서 어제로 과거를 보았는데,

응시자는 무려 7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만이 현 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거의 자리를 표해 두고 있다.

 

시사단이 보이는 도산서원 앞마당?(?)에 있는 400년이 넘은 왕 버들.

왕버들하면 언젠가 주산지에서 보았던 왕버들이 생각이 난다. 물속에 잠긴채 신비로움을 발산하던...

도산서원 앞 마당에 있는 이 왕버들도 봄날 잎이 나기시작하면 장관일듯 하다.

 

 열정이라 이름 지어진 우물로 도산서원에서 식수로 사용했단다. 안내문 내용을 일부 발췌하자면

우물은 마을이 떠나도 옮겨가지도 못하고 퍼내어도 줄지 않는다. 이처럼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하나하나 퍼내어 마시듯,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양해야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고 쓰여 있다. 

선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공부를 했을지 짐작이 가는 문구들이다.

 

 도산서원을 들어서서

 

 이 계단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보물 제210호인 전교당이 나온다.

 

계단 끝까지 오르면 진도문에 다다른다.

 

 

 진도문을 넘으면 도산서원 마당으로 들어서게 되고,  그 뒤로 전교당의 현판도 보인다. 

한석봉 친필의 도산서원 현판은 임금이 내린 사액 현판이다.  사액이란 임금(선조)이 직접 현판을 내린다는 뜻이다.   

 

도산서원 전교당(보물 제 210호)

퇴계선생이 돌아가시고 4년뒤 1574년에 지방의 유림과 선생의 제자들이 지은 건물이다.

두칸의 방과 여섯칸의 마루로 되어 있다. 요즘의 학교 교실과 같은 기능을 한다.

 

 

  

전사청(▼)으로 제사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평소에는 전사청 방에 묘지기가 기거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제사음식을 만들지 못하였으므로 묘지기들이 제사음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사청 마루아래 공간은 임진왜란때 서원의 책이 훼손 될 것을 우려해서 감추었던 곳이란다.

 

 

 도산서당

퇴계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교육하기위해 지으신 건물로 재력이 부족해 그 기간이 4년이나 걸렸단다.

 

  공기 맑은 곳에선 잠시 하늘도 한번 쳐다보는 센스..^^;  그럼, 이렇게 예쁜 하늘을 볼 수 있다.

 

 정우당

정우당은 도산서당 앞의 작은 연못으로 안내문을 그대로 발췌하면 국화는 꽃중의 은자라 하였고,

모란은 부귀의 꽃이라 하였는데 주렴계는 연꽃이 진흙탕에서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수록 맑고 바라볼수는 있지만 가지고 놀수 없어

꽃중의 군자라 하여  퇴계는 군자를 벗으로 삼아,  연꽃에 연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농운정사

 

 

 도산서원 상덕사 부 정문(보물 제211호)

이 건물은 퇴계이황 선생을 모시는 사당으로, 이를 둘러쌍 담장도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에는 흙담장이었으나,

도산서원 정비사업 때 현재의 돌담장으로 바꾸었다. 상덕사는 조선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엇으며 이황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곳이다. 도산서원의 제일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정면 3칸, 측면2칸의 정문을 두었다. 기단은 화강암으로 만든 돌로 4단을 쌓은 후,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정문은 정면3칸, 측면1칸으로 홑처마의 맞배집이다. 건물의 구조는 전교당과 비슷하여

네모기둥에 공포를 두지않은 간략한 굴도리집이며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꾸며 매우 검소하게 지은 건물이다.

  

  

 고직사

서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서원관리와 학생들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ㄷ', 'ㅁ'자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절반이상을 그늘을 만들어 주어 시원하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지은 것이다.

 

  광명실

전국 서원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약5000여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 오른쪽 건물을 동면광실이라하고,

왼쪽건물을 서광명실이라 한다. 동 광명실에는 역대와의 내사서적과 퇴계 선생이 자주 보시던 책이 있고 서 광명광실에는 퇴계선생이 돌아가신 뒤

근대에 발간된 책이 보관되어 있다 서광명시 옆을 보면 아주 오래된 고목나무가  한 그루가 섰는데 이 나무를 회나무라 한다

도산서원에는 회나무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이 나무에 열리는 수많은 꼬투리 중 하나가 저절로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 소리가 나는 꼬투리를 가슴에 품고 과거를 보면 장원급제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인지, 

 도산서원에서는 매년 한명이 과거에 급제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현판은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옥진각퇴계선생이 직접쓰시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 전시관으로

1970년에 건립한 현대식 건물로 외부는 한식, 내부는 현대식으로 지어졌다.

이곳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온게 못내 아쉬운... 

 

  

 

    도산서원을 돌아나오는데 어느새 앞서 돌아보시고  나오셔서 일행을 기다리고 계시는 두분,

해설사님과 우리나라 DJ, 칼럼니스트 김광한님, 김광한님은 현재 경인방송 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고 계신다.  

한번씩 팸투어에 동참하시는 김광한님은 자상함으로 늘 일행을 챙겨주시며 웃음을 주신다.

 김광한님은 현재 경인방송 FM(밤 10시~12시)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을 진행하고 계신다. 

 

다시 도산서원주차장으로 나가는데

 

 시선이 여러곳을 잡는다. 언덕위의 벤치도  주차장 입구의 하마비도 ...

 

  이곳을 지날때는 신성한곳이니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표시로 그 입구에 세워두었던 하마비,

도산서원에서 열공 ^^; 하는 유생들을 배려한 지혜가 아닐런지...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서원여행을 할 수 있는 안동,  안동의 서원 답사는 유교문화의 진수를 체험 할 수 있는 것으로

옛 선조들의 면학분위기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비춰 볼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안겨준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도산서원 주차장입구에 세워진 하마비를 보며,  비록 내 자식이 아니더라도

공부하는 유생들을 위해 말에서 내려 걸어가던 선조들의 배려속에 사람다운 정이 남아 있는 안동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