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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경상남도

[김해]황세바위의 슬픈전설이 있고, 가락국 최대의 생활유적인 봉황대

by 산수유. 2010. 2. 7.

                             

                             세바위의 슬픈전설이 있고,

가락국 최대의 생활유적인 봉황대(봉황동유적2)

 

 

 

봉황대는 김해 회현리패총의 서쪽인 구릉정상에 위치해 있으며, 구릉으로 오르는 산책로는 주변 풍경도 좋지만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어 김해시민들이 즐겨찾는 산책코스 이기도 하다.

 

 

구릉 정상부로 오르는 산책로는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어느정도 오르면 평지에 잔디가 깔려있어

야외 활동하기 좋은 날에는 지역주민들의 체육?공원으로도 활용되기도 하고, 유아시설의 나들이 장소로도 이용되기도 한다.

 

 

멀리 외곽으론 병풍을 둘러친 듯, 분산의 능선과 분산성도 보이고, 김해시가 한 눈에 보일 정도로 전망도 좋다.

 

 

산책로를 따라 조금 더 오르면 불에 그을린 듯 거무스름 한 커다란 바위가 나온다. 뭔가 큰 사연이 있을 듯한 느낌을 주는 바위..

 

 

 

 으례 그렇듯 여지없이 슬픈 전설이 서려있다. 이름하여 황세바위 전설.. 내용인 즉 이렇다.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숙왕)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 시키기로 약속 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속였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 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고 그 시합을 한 곳이 이 황세바위란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지금의 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 수 없이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을 약속 하였다.

그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다 죽었고,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병을 얻어 그해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지금의 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전설이다.

 

 

황세바위 주변에는 고목들이 심겨져 있고 벤치가 여럿 놓여져 있다. 여름날 시원한 그늘은 주변 마을 어르신들의 좋은 쉽터가 되고 있을 듯..

 

 

 

황세바위를 뒤로하고 계단을 따라 구릉을 더 높이 올라가면 구릉정상이다.

 

 

알 수 없는 자그마한 비석들이 낙엽에 묻혀 여러개 보였다. 일단 담아와 알아보는데 여의 낭자가 책을 보던 독서대라고 한다.

 

  

구릉의 모양이 봉황이 날개를 단 모양 같다고 하여 조선후기 부사 정현석이 "봉황대"라 이름 지었다고 전하며 산 정상부 암벽에는

부사 정현석이 "봉황대"라고 쓴 각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찾지를 못했다. 다시가게되면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넓은남방식 고인돌의 뚜껑돌로 보이는 한 개의 큰 돌이 현재에도 정상부에 있다는데...

내가 담아 온 사진 중 위(▲)의 바위가  분명한데.... 암튼 이곳 봉황대는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유적지이며 

2001. 2. 5일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지인 회현리패총과 더불어 "김해 봉황대유적"으로 확대지정되었다.

 

 

그리고 이 봉황대 정상의 바위들은 마치 거북등과 같이 유난히도 많이 갈라진 듯 하다. 

 

마치 거대한 거북의 화석을 보는 듯한 바위가...

 

  

 

갈라진 바위를 이리저리 쳐다보다 사잇길이 나 있는 곳으로 내려오니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봉황대라 쓴 각자가 아마도 저 커다란 바위에 새겨지지 않았을 까하는 생각이다. 우거진 대나무(?다른이름이 있던데..)로 인해 발견을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되었든 이 커다란 바위 밑에 있는 비석은 황세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여의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비석이며 그 옆에 여의각이 있다.

여의각 아래로 이렇게 가야의 고상가옥과 주거등이 복원된 또 하나의 봉황동 유적이 있다, 구릉을 사이에 두고 앞서 둘렀다 온 재현된 포구의 반대쪽인 셈이다.

  

  

  

 

 구릉 반대 쪽에서도 보았던 봉황동 유적의 망루로

외부인들의 출입이나 적의 공격등을 살피기위한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의 형태를 보인다.

이런 고상가옥(굴립주식)의 복원을 위해서는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이루어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고고학적인 증거로 유구의 모습이란다.

유구의 모습을 토대로 건축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그 당시의 고상가옥이 대충 어떤 형태로 이루어 졌는지 알수 있다는것..

그렇지만 짐작만으로 뭔가의 형태를 복원해 낸다는게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서 확실한 자료로 활용되는 것이 주로 고분벽화나

당시의 유물들 또는 민속지등을 통해 그 모습을 본떠 만든 토기들이 중요한 자료가 되어 참조가 된다고 한다.

 

 

설명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는 반 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김해 봉황동유적은 김해시 봉황동(발견된 당시 김해읍 회현리)에서 발굴된 조개더미 유적으로서 흔히 이를 김해패총이라고 한다.

패총은 옛날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이 층을 이루며 쌓여 있는 유적을 말하며, 조개무지 또는 조개더미라고도 합니다. 마을 주위에 먹고 버린 조개껍질과 함께 물고기뼈, 동물뼈, 깨진 토기, 석기, 뼈제품 등의 유물이 버려지는 일종의 쓰레기더미 이므로 그 속에는 사람이 만든 유물과 자연유물 등 아주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특히 조개껍질의 칼슘성분이 조개껍질층 뿐 아니라 그 밑에 형성된 문화층에까지 스며들어 모두가 알칼리성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유기물질까지 잘 보존하여 다양한 자연유물들이 출토된단다. 따라서 패총 속에는 비록 파편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해안가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한 생활도구와 용기는 물론 제사물품 등이 출토되므로 그 때의 생활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여러 가지 종류의 조개류와 동물뼈와 식물의 씨앗류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어 그 분포에 의해 당시의 해안선 복원과 해진·해퇴 현상 및 지리적 환경을 복원할 수 있고, 당시 사람들의 식료와 그 획득기술을 추정 복원할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패총 속에는 종종 사람뼈가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인종 연구 및 여러 가지의 신체변형 풍습 등의 체질인류학적 연구까지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회현리 패총은 삼한 전기부터 금관가야가 멸망하기까지 오랜 기간동안 형성되었으며, 패총의 동쪽 구릉의 봉황대유적에서는 많은 집터가 발견되었다.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비롯한 생활 쓰레기를 버려서 형성된 패총임이 분명합니다. 이 회현리 패총봉황대 마을은 금관가야의 중심으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패총의 북쪽에 위치한 대성동 구릉에 그들의 공동묘지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출처:가야역사와문화)

그러고 보니 회현리 패총을 돌아보아야 할 듯...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번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