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이야기.../인천광역시

아름다운 이름뒤에 감춰진 슬픈사연의 홍예문

by 산수유. 2010. 4. 21.

 

 

아름다운 이름뒤에 감춰진 슬픈 사연의 홍예문 

 

인천 중구  송학동 2가 20번지에 자리한 홍예문은  문화재청 자료를  보아도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하였고. 당시 일본이 자국의 조계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조성한 축조물이다.
현재 인천의 남북을 연결하는 인천의 명물로 자리 잡았으며, 당시의 일본 토목공법 및 재료에 대한 사료로서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정도만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홍예문은 우리 역사속에서 조선인들의 애환과 고된 노동 그리고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세워진 슬픈역사를 담고 있는 문이다.
 
강화도조약으로 제일먼저 인천에 발을 딛게된 일본은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를 만들고 그들의 필요에 의해 응봉산 산허리를 자르고 터널을 뚫고자 했다.
홍예문의 설계와 감독은 일본이 맡았고, 중국산동에서 온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하고 흙을 날으는 일이나 잡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여를 했단다.
공사가 어느정도 진행 될 쯤 예상치 못한 암반이 나오면서  흙을 실어 날으던 우리나라 인부 50여명이 흙더미에 깔려 죽게되는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인명사고와 함께 예상치 못한 비용이 들자 일본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짓던 것을 우리정부에 그 비용을 떠 넘기게 되고 결국 총공사비 절반을
우리정부에서 부담하게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난 공사 끝에 1908년 사방50cm에 폭4.5m, 높이13m의 돌문이 생기는데  대부분 남문 또는 북문등 이름이 붙여지지만 이 문에는 그런 이름조차 없어
사람들은 이문을 홍예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홍예문이란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란 뜻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름다운 미적감각을 보여 주었는데
일본 사람들은 '아나몽'이라하여 '구멍뚫린 문'이라고 실용적인 면을 강조해서 불렀다고 한다.
 
한 때 홍예문 꼭대기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인천항은 물론 날씨가 좋으면 멀리 팔미도나  대부도, 영흥도, 용유도등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홍예문으로 부르면서 굳어진 홍예문은 현재 유형문화재 제49호로 등록되어 있다.
오래전 부터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길이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곳인데 이곳에서  영화나 드라마등도 촬영되면서 인천의 명소로 자리잡은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길을 따라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데 홍예문 주변을 걷고 있는 학생들과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은 그리 좋은 인상으로
다가오지만은 않았다. 어찌보면 매우 위험한 상황들을 보는 것 같은 ...
 
처음 일본이 홍예문을 내고자 했던 목적이 교통수단에 있었다는것, 최단거리로 움직이기 위해 이 응봉산 산허리를 무리하게 뚫어가며
수십명의 목숨까지도 앗아간 결과로 얻어낸 결과물임을 알지만, 이제는 교통도 발달한 시대에 있는데 이 거리는 시민들의 도보로서의 길로
내어 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존의 가치가 있고 명물로 지켜지기위해서는(지자체가 해당되겠지만)관계당국이든 시민이든 서로 그 만큼의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여름이면 이길을 따라 자유공원을 오르면 데이트 코스로는 그만이다. 걸을 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요즘 에어컨 바람은 비할바 못 되는..
더군다나 시멘트의 칙칙함을 푸르름으로 감싸고 있어(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름답게 다가오던 것으로 기억되는 홍예문이다.
많은 희생이 따르면서 지어진 것이기에 더욱 잘 보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 위치 : 인천시 중 구 송학동

    중구 문화관광과 ☎ 032-760-7124

 

찾아 가는 길

경인고속도로-월미도 방향-인천우체국-홍예문

전철1호선(인천역)-차이나타운-자유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