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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인천광역시

백년이 넘는 유서 깊은 문화유적, 답동성당

by 산수유. 2010. 4. 22.

 

 

"일상이 여행이 되는 그곳 - 낭만의 도시 인천"

인천을 소개하는  테마여행 책자 표지에 쓰여있는 글귀다. 이 답동거리가 내게는 그랬다. 오래전 일상이였던 거리가 이제 여행지가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제일 변하지 않고 제일 눈에 익었던 이 거리가 내심 반가워 모두가 답동 성당으로 올라간 틈을 이용해 한컷 담았다.

달라진게 있다면 중앙선 분리대가 막혀 있다는 것.^^; 번화가였던 거리가 그대로 있다는 건 다시말해 그 긴 세월동안 침체됨을 의미하는건가...

 

 

 

  

답동성당은 천주교 박애가 사라진 후, 인천 개항과 함께 세워졌고, 명칭이 제물포성당에서 인천성당 그리고 답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뀐

백년이 넘는 유서깊은 문화유적이다.

 

현재 답동성당에 대해 천주교인과 인천 시민들은 문화적 의미보다는 정신적, 신앙적 요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천주교 인천교구 교좌성당으로 120개의

성당과 40만 천주교 신도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란다. 답동성당의 역사는 19세기말 한.불조약으로 자유를 얻게되자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은 파리 외방선교회에서 선교활동을 공식화하고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1842∼1896년)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 1일이다. 빌렘 신부는 일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84명(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단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바오로 1890~1893)가 2대 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갔다. 마라발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 4대 드뇌(전 으제니오1904∼1937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19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성대한 축성식을 가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출처 : 답동성당 홈페이지)

 

    (출처 : 답동성당 홈페이지)

 

  

 

  

  

 

나는 성당을 떠 올릴때면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20살이 되던해 친하게 지냈던 친구를 몇해 만에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내게 같이 갈 곳이 있단다. 초등학교 동창이니 가보면 안다고 하면서 데려간 곳에서 만난 친구는 암 말기 환자였다.

그때 기억은 매우 마른 몸에 푹~ 들어간 두 눈두덩이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모습에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친구가 방으로 밀면서 "00아, 기억할거야. 00이도 왔어"하고 인사를 시키자 병중에 있던 친구는 손을 내밀며 와주어 고맙다고 한다.

그러더니 오랜만에 만난 나를 대접해야 한다며 옆에 있던 수녀님에게 잡아 달라고 하더니 부엌쪽으로 가잔다.

그냥 있으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친구를 잡아 주려고 하는 나를 데려간 친구가 손을 잡아 앉힌다. 하는데로 두라고 귓속말로 건네며...

그렇게 가져온게 쵸00이인듯싶다.,  그걸 더듬거리며 굳이 포장을 뜯더니 자기가 있는데서 다 먹으란다.

한입 베어 물고 먹지 못하는 나를 눈치 챈 수녀님들이 옆에서 수다 아닌 수다로 주변 분위기를 바꾸던 기억.. 

수녀님과 친구는 여느 사람을 대하듯 웃고 있었는데 나는 도저히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친구가 그 집을 들어가기 전 부탁을 했었다.

"그냥 똑같이 말해.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알았지?"하고 했던 말이 나중에서야 기억이 났었다. 나는 그날 그 자리에 굳은채 앉아 있다가

"다시올게 00아"라는 말만을 겨우 남기고 나오고 말았었다.  친구말에 의하면 생명이 얼마남지 않아 수녀님들이 교대로 수발을 한다는 이야기다. 

그날은 머리를 감는다고해서 수녀님이 두분이 와 계시는 것이라고.. 그후 일주일 정도지나 계속되는 뭔지모를 끌림이 있어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우리가 다녀간 다음날인가 너무 행복한 모습으로 떠나 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0살의 어린나이에 죽음을 행복한 모습으로 맞이 할 수 있었다는게 종교라는 것,  그동안 무교인 집에서 자란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계기가 되었고

내가 결혼이라는 선택을 할 때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이 바로  그 친구의 기억으로 인해 종교를 가진 사람이고  집안이였다.

친구가 갑자기 떠나 연락을 할 수 없었다는 말과 더불어 잊혀지지 않던 말은 " 너도 찾더라"그리고 친구를 방문했던 그날

병중에서도 친구를 생각하며 하는 말들 속에 '너를 위해 기도 할거야'라고 했던 말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인천에 오니 생각나는 지난 추억속 친구와 그녀가  내게 미친 종교에 대한 영향은  젊은시절

교회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는 내  삶의 한부분이였다.  암튼 이런저런 잊혀졌던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던 여행이였다.  

 

이런경우가 유독내게만 있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든 믿는 이의 그 삶을 통해 끓임없이 믿음을 갖는 계기를

얻게되는게 아닌가 싶다. 답동성당이 그 역사가 백년이 넘는다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을지...

 

 

  

 

※ 교통편 안내 (대중교통) * 버스노선 : 2번 34번 4번 3번 * 전 철 : 동인천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