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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충청도

[충남-부여]찬란했던 백제문화를 만나다, 국립부여박물관

by 산수유. 2010. 5. 31.

  

  

국립부여박물관에는 백제일원의 청동기시대 중심의 선사실과  백제유물의 역사실 그리고 백제시대 불교미술품 중심의 불교미술실,

야외전시실 등에 1,1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사비백제의 발자취와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당유인원기공비(보물21호)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로,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보광사대보광선사비(보물107호)

고려시대에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의 공적을 새긴 비로, 원래 충남 부여군 성주산의 보광사터에 있던 것을 1963년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2차에 걸쳐 새겼으며, 앞면은 건립당시인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새겼고 뒷면은 조선 영조 26년(1750)에 추가하였다.
‘보광사중창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석비양식과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동사리석탑

고려시대 유행한 석탑양식으로 원래 부여군 세도면 동사리에 있던 석탑으로,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면에는 각면마다 3개의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위층 기단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네 모퉁이마다

돌출된 꽃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는데, 2층 몸돌부터는 심하게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꼭대기 장식은 모두 없어졌으며, 지금의 장식은 훗날 새로 만들어 복원해 올려놓은 것이다.

 

 

박물관 실외에는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원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석조들

  

 

   

 

 야외전시장에 있는 예비석중에는 받침과 머릿돌을 장식한 비석들이 있다.  머릿돌은 보통 이무기가 조각되어 이수라고 부른다,

 

성주사지 출토 비석받침 (龜趺. 좌)▲

비석받침[龜趺]은 거북모양의 돌비석 받침돌을 가리킨다. 거북의 잔등에 장방형의 비좌(碑座)를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그 뒤 전시대를 통하여 성행하였다.
이 비석받침은 머리와 몸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다리와 거북의 등모양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수법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상부에는 비신을 꽂을 수 있는 비좌가 마련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석받침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성주사지 출토 비머리 (?首, 중)▲

이수(?首)는 이무기를 새긴 비석(碑石)의 머릿돌을 가리킨다. 이수는 일찍이 중국 한(漢)나라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당(唐)나라에 이르러 절정기를 이룬다. 이 성주사터 발견 비머리는 전체모양이 훈형(暈形)으로 반룡(蟠龍)들이

서로 얽힌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석비(石碑)를 물고 비신을 일제히 들어올리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연꽃무늬석등받침들

 

박물관석조여래입상

 

  

 부여석조(보물194호)

이 석조는 부여현의 동헌건물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박물관에 옮겨 보존했다.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겨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자형 받침 위에 둥근 꽃봉오리 형태의 석조가 올려져 있으며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는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로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고,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위에 설명되어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에 나오는 다섯 악사의 악기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288호)

감실입구 양쪽에 각각 10글자씩 쓰여 있으며,  '백제창왕13년(567)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라는 내용이다.

백제시대에도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예라 할 수 있다.

 

사택지적비현재 남아 있는 백제의 유일한 금석문으로 백제 의자왕 때의 대신이었던 사택지적이 남긴 비이다. 

높이 102㎝, 폭 37.9㎝, 두께 29㎝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비면은 길이 7㎝인 정방형 선으로 금을 그어, 각 행에 모두 14자씩 4행으로

모두 56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그가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만든 것으로, 중국에서 오랫동안 유행한

사륙병려체로 된  아름다운 문장이 담겨있고, 글씨에서는 웅건한 힘이 느껴져 당시의 문화수준을 가늠하게 한다. 

 이 비를 통해 백제에 이미 도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부여 외리 유적에서는 산 경치 무늬, 용 무늬, 봉황 무늬, 도깨비 무늬 등 아름답고 정교한 무늬벽돌이 발견되었는데

백제기와는 신라와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줄 정도로 기와 제작방법이 뛰어났다.

 

 

국보 제293호의 금동관세음보살입상

7세기 초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높이는 21.1㎝이다.

1970년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 묻혀 있던 무쇠솥에서 발견되었다.


 미륵사석등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1번지 041) 833-8562~3

[평일] 09:00 ~ 18:00 [주말,공휴일] 09:00 ~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