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이야기.../경상남도

[통영] 도천테마파크에서 유품으로 만난 음악가 윤이상

by 산수유. 2010. 4. 1.

 

지난해 음악가 윤이상에 대해 그 흔적을 찾아보고 포스팅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글이 필요한 날짜가 당겨지는 바람에 어렵사리 시간을 낸 토요일 오후 찾아간 통영은 그동안 바람을 쏘이려고 찾았을 때 느끼던

편안함의 통영이 아닌 부담으로 다가왔던  통영이였다. 더불어 윤이상님에 대한 통영 사람들의 여러 생각도 들을 수 있었던...  

 

그당시 이런저런 자료를 찾던 윤이상님에 대한 2009.11.24일 기사가 있었다. ['53년 만에 돌아온 음악가 윤이상(1917~1995) 선생의 유품 412점이

고향 통영으로 귀환했다'...귀화된 유품은 맏딸 윤정씨가 독일 베를린 생가에 보관하던 첼로, 악보, 통영소목장 등 총 148종 412점이며,

유품 중에는 독일 유학길에 오른 1956년 대한민국 여권과 통영에서 제작된 3층 구조의 통영소목장과 생전에 직접 연주했던 바이올린과 첼로,

친필서신과 사진 600점, 평소 키홀더에 넣어 다녔던 소형 태극기와 필기구 등 보존가치가 높은 것들이고 이 유품들은 올(작년기사로 이해해야..)

12월에 준공예정인 도천 테마파크내 윤이상기념관에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라는.. 이런 기사를 읽고 그 유품들이  참 궁금했었다.


통영 팸투어가 진행되던 중 윤이상 기념관이 오픈 되기 이전에 앞서 기념관을 관람 할 기회가 생겼다. 

기념관을 찾았을 때 키 홀더에 넣고 다녔다던 태극기를 먼저 찾아 보았다. 크기가 어느 정도이기에 키 홀더에 넣고 다녔다는 건지..

해서 보니 쇼케이스에 진열된 태극기는 차곡차곡 접었을 때 겨우 키홀더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기념관 내부

 

마흔해 동안 통영사람으로 살다  떠난 유학길에서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고향이였으니.....

윤이상님이 늘 품고 다녔다는 태극기를 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컷을지..., 유품에서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듯하다.

  

  

직접 작품 해설을 해놓은 친필 작품노트로 윤이상님은 독일어로 작곡을 했더라도 반드시 한글로 작품 해설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음악은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음악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고향의 풍광소리가 그의 음악을 키웠고 많은 영감을 받은 윤이상은 민족음악가로 위상을 높였으며

음악을 통해 동서양을 잇고 분단과 삶의 아픔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예술가이다.(기념관 내 전시글 발췌)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윤이상님의 흉상이 정면으로 보인다. 이는 북한에서 기증한 것이다.

 

 

그가 만든 작품들을 보면 가곡5편, 동요70여편, 독창곡4곡, 독주곡 18편, 실내악곡 52편,협주곡13편, 관현악곡 21곡,  칸타타 및 합창곡 10편, 4편의

오페라등 방대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음악은 그가 타계하기 일년전인 1994년 예음문화재단의 주관으로 ‘윤이상 음악축제’가 개최되면서 소개되기 시작 했다.

이후 꾸준히 윤이상님의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 연주되고 있고, 일부에서는  앞으로도 그의 음악이 더욱 연구되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살아생전 사용하던 바이올린

 

   생전에 사용하던 첼로

 

 

 윤이상선생의 음악은 동양적 정서를 서양의 연주기법에 담아 독특한 선율로 구현했기에 현대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이러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

       

 세계에서 작가에게 주는 권위있는 훈장으로 알려진 괴테상으로 윤이상선생은 1995년에 받았다.

 

 독일 정부가 윤이상선생에게 수여한 독일 최고의  '문화훈장'

 

독일 'Kiel문화상' 

기념관을 천천히 돌아보다. 메달앞에 서 있자. 옆에 계시던(관계자분 같았는데..) 메달에 대해 한말씀 더 하신다.

그의 음악성을 세계는 벌써 알아보고 이런 상들을 수여한 것이라는 점에서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고...

 

아주 귀한 사진이란다.  여류시인 이영도님과 청마 유치환선생과  나란히 함께하고 있다.

 

선생의 생활 유품들도 진열되어 있고..

 

 

생전에 쓰시던 년도별 수첩으로 평소 꼼꼼히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단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보낸글과  성탄카드 등이 진열되어 있다.

 

 

눈을 감으며 그가 그렇게 그리워했다던 통영이였다는데 내가 앞서 방문해서 그의 흔적을 찾아나선 길에서 만난 이들은

윤이상이란 이름조차도 생소해 하리만큼의 느낌이 왔었다는 것을 그동안 저버릴 수 없었다. 

이상님에 대한 일부 통영인들의 닫혀있는 듯한 반응과는 달리 팸투어가 있던 날, 또다른 통영을 보았다.

예향의 도시답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음악가윤이상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음을....

 

 

세계인들이 먼저 인정한 작곡가 윤이상, 사람마다 어찌 생각하고 이야기 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글귀에 그가 남긴 한마디는

우리나라가 겪은 아픈 역사 만큼이나 강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었다.

 

 저는 작곡가로서 더욱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두고 좌니 우니, 동이니 서니 하고 왈가불가 하는데,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늘 제가 있을 곳에 있으니까요, 그래요 저는 동아시아에서 왔고 유럽에서 살고 있는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곡가일 뿐입니다."는...

 

통영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도천 테마파크에 지어진 윤이상기념관에서 비록 유품으로 음악가 윤이상을 만났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독창적인 음악언어로 동서양을 잇는 음악의 원류였음은 모두에게 기억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