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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전라도

[전북-익산] 남여유별의 관습이 만들어 낸'ㄱ'자형 두동교회

by 산수유. 2010. 4. 24.

  

조선중기 성리학의 영향으로 남녀유별의 유풍은 한국교회건축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형태의 예배당을 탄생시켰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의 금산교회(전라북도문화재자료136)와 전북 익산시 성당면의 두동교회(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9)는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ㄱ’자 형태로 지은 교회건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위 두곳 뿐이며, 한국기독교 전파 과정의 이해와

교회 건축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건물로 이해되고 있다.

두동교회의 시작은 이 지역의 3천석지기 박재신이야기로 부터 시작되는데 당시 두동마을에 부자 박재신이 살았단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마을세금을 대납해 주는가 하면 기근 때  주민들을 구제하는 등의 자비를 베풀며 사는 사람이었단다. 

박재신의 어머니와 아내인 한재순, 그리고 고모인 박씨 부인등이 교회를 다니자, 당시 손이 귀했던 박재신은

“예수 믿으면 집안이 복을 받고 자식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여자들이 교회가는 것을 묵인해 주고 결국 부인이 임신을 하자,

부인이 3킬로미터나 떨어진 교회로 예배를 다닌것이 안타까워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 처소로 내놓았다.

해서 1923년 5월18일, 구연직 전도사를 모시고 박재신집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두동교회의 시작이란다.

 

이후, 아들이 태어나고 이름을 요한이라  짓게된다. 두동교회는 박재신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1년사이 교인이 80명으로 증가하여 곳간으로 쓰던

ㄱ자형 창고를 예배당으로 사용하나 아들이 병으로 죽게되자 박재신은 이에 마음이 변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고모가 상을 당하게 되는데

출상일이 주일이라 3일장을 못하고 4일장을 해야 한다는 전도사와의 의견충돌로 박재신은 자기 집에서 예배를 볼 수 없도록 하였다.

이에 교인들은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부근에서 유일하게 박재신의 땅이 아닌 현 위치의 채소밭을 구입한다.

1929년 6월 때마침 안면도 소나무를 실은 배가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하여 두동리 근처 성당포까지 떠내려 오자  이나무를 사들여 

‘ㄱ’자 구조의 예배당을 짓게 된 것이 현재 남아있는 두동교회라고 한다. 


 

모두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역시 오래전 부터 두동교회가 궁금했었는데...

 

 

두동교회는 강단 양옆의 공간이 똑같다. 참고로 금산교회는 강단이 남자석을 바라보고 있으며 좌석도 여좌석 보다 길다고 한다. 

 

또한 두동교회는 1933년까지 초등과정인 성영학원을 운영했단다. 성영학원에서는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가르치치기도 하며 

일본 형사의 검문을 받게 될 때는 아래와 같은 공간을 두어 이곳에 책이나 기타 필요한

부분들을 감추는 곳으로 사용 했다고 한다.

 

 

     

  

     

   

 

 

이미 두동교회의 역사를 알고 있었던 나는 와보고 싶었던 만큼이나

두동교회 지난 역사를 뒤로 하고 남아 있는 물건들을 보니 한층 더 쓸쓸히 느껴졌다.

 

 

 두동교회 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385 ☎063-861-0348